안녕하세요~ 8월 15일 광복절이 있었던 이번 주의 마지막 날인 일요일을 다들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저는 어제 천안 독립기념관에 다녀왔는데 독립기념관에서 본 독립운동가분들의 말씀들을 적어보려 이렇게 글을 쓰게되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에도 우리나라의 가치가 다시 새겨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독립박물관에서 본 이 말들로 받은 감정이 여러분들께도 고스란히 전달되길 바라며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원수 일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유관순

청년시대에는 부모 형제, 처자의 사랑보다
한층 더 강하고 굳센
사랑이 있음을 각오했다.
독립운동의 길로 가겠다는
결심이었다.
-윤봉길

독립운동은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운동이고
독립운동가의
자유의사와 결의로 수행된다.
-이회영

혁명을 위해
광복군의 앞길을 위해
여성의 권리와 의무를 위해
광복군에 용감히 참가합시다.
-오광심

강도 일본은
우리 민족 생존의 적이다.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불합리한 제도를 개조하여
이상적 조선을 건설하리라
-신채호

나라는 완전히 독립되어야 하고
민족은 철저히 해방되어야 하며
사회는 반드시 평등해야 한다.
-신익희

죽음의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을 계속 하리라

우리 동포 형제들이여
천만배 힘을 내어 뜻을 굳게 갖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을 하나로 모아 힘을 합쳐
우리의 자주독립을 회복한다면
나는 지하에서 기꺼이 웃으련다.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다.
조국의 자주 독립이 오거든
무궁화 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란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아, 보고 싶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던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나는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김구(나의 소원)

감사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감사합니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밑의 글은 독립박물관의 설명글과 사진을 많이 모아놓은 글입니다. 이 글을 통해 제가 느낀 울림이 고스란히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https://bluehairpin.tistory.com/72 >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제보다 더 날씨가 선선해서 참 좋았습니다. 물론 땀이 날 정도로 덥기는 했지만요~ 여러분들은 오늘 어떻게 지내셨나요?
저는 오늘 천안 독립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이번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현충시설에 방문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4시 45분쯤 박물관에 도착했는데 이 때도 많은 분들이 계셨습니다.
천안 독립박물관의 하절기 입장시간은 9시30분 부터 5시까지 이며, 관람시간은 9시 30분부터 6시까지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천안 독립박물관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독립박물관에서 제가 본 것과 정말 우리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우리 조상분들의 독립 운동에 대한 박물관에 적혀있는 글들을 보여드리고자 많이 가져왔으니 독립박물관을 가기 전 읽고 가신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박물관을 가기 어려운 분들께서도 이 글을 보시고 제가 오늘 보고 느낀 소중한 시간들이 여러분들께 고스란히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멀리서도 잘 보이는 이 것의 이름은 '겨례의 탑'입니다. 겨례의 탑은 막 대지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의 날개 같기도 하고 기도하는 양 손과 같기도 한 독립기념과의 상징탑이다.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영원불멸하게 웅비하는 한민족의 기상과 자주와 독립, 통일과 번영에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높이는 51.3m이며, 가로 세로 각 24m의 기단 바닥에는 우리나라 지도와 24방향을 표시한 구리 주물판 24괘가 있고 탑 양 날개 연결부위에는 무숭화가 조각되어 있다. 라고 설명의 글이 적혀있습니다. 이 탑은 멀리서도 잘 보여서 저는 이 탑만 보아도 독립의 희생과 웅장함과 슬픔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 못의 이름은 '백련못'입니다. 백련못은 둘레 1,500m, 수심 1.8m의 인공호수이다. 주변의 자연수가 흘러 들어와 폭포와 월류벽을 거쳐 흐르며, 바닥은 약 2m의 진흙을 다져 자연 호수와 같이 조성하였다. 주변에는 전통 조경수와 꽃, 애국지사들의 시, 어록비들이 있어 아름다운 경관과 자연스러운 교육의 장을 이룬다. 백련못이란 이름은 진창속에서 고결한 연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웠던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가장 숭고한 애국애족의 민족정신이 꽃피었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설명의 글이 있습니다.

독립박물관에 있는 이 많은 태극기들을 보면 참 마음이 쓰리면서도 눈물나게 감사하면서도 죄송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그럼 독립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보시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이렇게 '역사속의 태극기'가 있었습니다. 태극기를 뭐라 표현해야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말로 표현못할 감정이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지금 이 현재를 위해 얼마나 많은 태극기가 휘날렸는지모르지만 그 이유로 인해 태극기를 보면 목보다 마음이 먼저 울리는 것 같습니다.

위에서 보신 독립박물관 건물로 들어오시면 다시 야외로 나가게 되고 야외에 많은 박물관이 있습니다. 1관, 2관, 3관 이렇게 '관'들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관들 외에도 독립박물관에는 다양하게 역사와 나라를 알 수 있는 공간들이 많습니다.
한켠에 '우리 땅 독도의 역사와 자연'에 대해 알 수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많은 내용 중 '독도를 지키기 위한 노력' 부분을 가져왔습니다.

 



지금부터는 '나라되찾기'관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관에 있는 글들의 중 많은 글들을 가져왔습니다. 사진은 이 관에 있는 사진이나 글과 맞지는 않는 점 유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글로 인해 많은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고, 제가 이 곳에서 느낀 그 느낌이 그대로 전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시면 '무명독립군상'이 보입니다. 무명독립군상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주와 연해주의 산간 오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희생된 독립군들의 투쟁정신과 그들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한 '무명독립군상'이라고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독립군기지개척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민족운동가들은 중국 만주지역과 러시아 연해주지역 등으로 이주해 독립군기지를 개척했다. 서간도의 유하.통화현 등과 북간도의 용정촌 및 연길현국자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등이 대표적인 초기 독립군기지였다. 민족운동가들은 이들 지역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자치기관을 세우고 민족학교와 독립군 양성소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했다. 서간도에서는 1911년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세우고, 이듬해에는 이를 발전시켜 부민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을 기반으로 신흥무관학교 및 백서농장을 설립해 독립군요원을 육성했다. 북간도 에서는 1910년대 초, 간민회라는 자치기관을 조직해 한인사회를 관할하며 동림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했다. 그리고 북만주 독립군기지에서는 밀산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들을 배출했다. 연해주에서는 국내에서 의병활동을 주도했던 유인석, 이범윤 등이 13도의군을 창설해 무장활동의 기반을 마련했다. 1903년 하와이이민 이후 형성된 미주한인사회는 1910년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되어 조국광복을 위한 단체로 활동했고. 1914년에는 박용만 주도로 대조선국민군단이 조직되어 많은 독립군을 배출했다.

간도의 한인 이주지역
한인의 서북간도 이주는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점진적으로 증가하던 서북간도의 한인은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부터 급증했다. 이들 이주한인은 척박한 만주벌판에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황무지를 개간해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리고 자라나는 2세들에게민족교육을 시키고, 독립군기지를 구축하는데 힘을 모았다. 이들이 형성한 한인사회는 일제하 한민족의 맥을 이어진 물줄기이자 조국광복의 원동력이었다.

독립전쟁선포
1919년 3.1일 운동 이후 우리민족의 조국광복에 대한 의지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에 서북간도 및 연해주의 민족운동가들은 항일독립투쟁의 전개를 위하여 무장 독립군단을 편성하고 일제를 향해 독립전쟁을 선포했다. 독립군의 무장활동은 독립군단의 근거지가 있는 만주나 연해주에 침입한 일본군을 상대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으나 국내진입 유격전이 주류를 이루었다. 2, 3명 또는 많게는 10명 이상으로 편성된 유격대는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국내로 진입해 일제의 주요기관을 파괴하고 침략자들을 처단했다. 유격전의 주요 무대는 함경도 및 평안도 지역이었으나 특수임무를 띠고 서울 및 그 이남지역까지 진입한 경우도 있었다.

봉오동전투
독립군의 국내진입 유격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1920년 6월 4일 약 30명으로 구성된 독립군 유격대는 종성북방의 강양동으로 진입해 일제의 헌병순착대를 격파하고 만주로 귀대했다. 큰 타격을 입은 일본군이 2개 중대 병력으로 독립군을 추격했으나 독립군들은 이들 일본군 병력을 또 다시 만주의 삼둔자에서 대파했다. 일본군은 다시 약 250명의 병력으로 추격대를 편성해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 골짜기로 진입해 왔다. 일본군의 추격을 사전에 알게 된 홍범도의 대한독깁군, 안무의 대한국민회군, 최진동의 대한국무도독부군 등은 서로 연합해 전투를 벌일 준비를 갇추었다. 봉오동은 마치 삿갓을 뒤집에 놓은 것 같은 지형의 골짜기였다. 이곳으 로일본군을 유인한 독립군들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총공격을 펼쳐 대승을 거두었다. <독립신문>에 의하면 봉오동전투 결과 일본군은 전사자 157명, 주상자 300여명이었고, 독립군은 전사자 4명, 부상 2명뿐이었다.

조선혁명군. 한국독립군 활동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은 1930년대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독립군단이었다. 조선혁명당의 당군인 조선혁명군은 효율적인 항일전을 위해 만주지역 항일세력과 연합해 한중연합군을 편성했다. 양세봉 총사령관의 지도하에 영릉가,  청원, 쾌대무자 전투 등 1930년대 후반까지  항일전을 펼쳤다. 한국독립당의 당군인 한국독립군 역시 중국항일군과 연합군을 결성하여 1930년대 중반까지 경박호, 사도하자. 동경성. 대전자령 전투 등 수많은 전투를 전개해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은 1930년대 중반 이후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동해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하거나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이후 한국광복군의 기반이 되었다. 

일제의 끊임없는 탄압에도 독립군들은 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에 일제는 중국측의 힘을 빌어 만주의 독립군 및 배일한인들을 탄압하고자 1925년 6월 11일 중국과 '미츠야협정'을 체결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츠야 미야마츠와 봉천전성 경무국장 우진사이에 체결된 이 협정은 중국이 반일감정을 표출하거나 독립운동을 하는 한국인들을 붙잡아 일제에 인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협정체결 후 수많은 독립군과 만주 거주 한인들이 중국 군경에 살해되거나 붙잡히고 추방당했다.

간도참변
청산리에서 독립군에게 대패한 일본군으 그 보복으로 독립구느이 모체인 한인사회에 대한 만행과 독립군기지 파괴 등을 자행했다. 우선 독립군이 떠나고 난 북간도 연길현 명월구의 대한독립군 병영과 하마탕의 대한국민회군 근거지를 초토화하고 왕청현 십리평의 사관연성소를 불태웠다. 이어 한인사회에 눈을 돌려 민족학교는 물론이고 기독교의 교회까지 한인들이 공공장소로 만든 건물은 모두 불을 지르고 파괴했다. 용정촌 동북쪽의 장암동에서는 33명의 남자를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질러 몰살시켰다. 일본군의 만행은 이듬해 4월까지 이어졌다. 일제의 만행이 가장 심했던 1920년 10월과 11월 두 달간 한인사회의 피해는 피살자 3,664명 , 피체자 155명이었고, 민가 3,520채, 학교 59개교, 교회 19개소와 곡식 59,970섬이 불에 타 없어졌다.

의열투쟁
의열투쟁은 한 개인의 힘으로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를 응징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따라서 일제강점 초기부터 수많은 의사들이 폭탄과 권총, 비수를 들고 침력자 일제에 대항하여 싸웠다. 의사들의 의거대상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 경찰서 등과 같은 식민지 수탈기관이나 이들 기관들에 소속되어 우리민족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일제의 고관 또는 친일 주구배들이었다. 의사들은 이들 의거대상을 단독으로 혹은 뜻이 맞는 동지들과 단체를 결성해 의거를 일으켰다. 강우규, 양근환, 송학선, 이수홍, 조명하. 장진홍, 박열, 서상한 등의 의사는 개인의 의지로 의거를 일으켰다. 그리고 대한광복회 , 27결사대, 철혈광복단, 구월산대, 병인의용대, 공명단, 남화한인청년연먕, 대한애국청년당, 의열단, 한인애국단 등에 소속된 의사들은 단체의 지원을 받아 개인 또는 몇 명이 함께 일제를 상대해 싸웠다. 독립운동 기간에 전개된 의사들의 의거는 조국 광복의 초석이었다.

한인애국단 선언서
- 왜적은 본 단을 가리켜 싸움하기를 즐긴다 하나 우리는 인류의 진정한 행복을 위하여 싸우기를 희망할 뿐이고 침략성을 가진 이름없는 싸움을 바라는 자가 아니다. 우리가 허다한 희생을 돌보지 않고 끝끝내 폭렬한 행동으로 대항하는 것은 우리 손에는 아무런 무기가 없고 사선을 쫓겨난 우리 한국 사람인지라 이 길을 버리고는 또 다른 길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독립이 성공되지 못하는 날까지 이런 폭렬한 행동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 본 단은 왜적 이외에는 어느 나라 사람이나 다같이 친우로 대하려 하며 절대로 이들을 해치려 하지 않으니 이것은 홍구공원의 사건이 증명하고 있는 바이다.

-최, 유 두 의사의 사명은 동북을 침략하려는 적수 즉 관동군사령과 본장번 남만철도 총재 내전강재, 관동청 장관 산강만지조 등을 죽이려 함에 있고 결코 국제연맹조사단에 해를 가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 한민족은 신성한 민족의 후예요, 본 단은 순수한 애국 단체이다. 비록 죽는한이 있더라도 왜놈들과 같은 야만적 방법을 흉내내어 국제 문제를 일으키려고 하지 않는다.

- 본 단은 철저히 구국 단체로 오직 견고한 자립 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분투할 뿐이요, 결코 어느 외국인이나 어느 외국 정부를 의뢰하지 않는다.

대한민국14년(1932) 8월 10일 한인애국단

이 관의 마지막은 김광섭 시인이 적은 '나의 사랑하는 나라'로 끝이 난다.

지상에 내가 사는 한 마을이 있으니
이는 내가 사랑하는 한 나라이니라

세계에 무수한 나라가 큰 별처럼 빛날지라도
내가 살고 내가 사랑하는 나라는 오직 하나뿐

반만년의 역사가 혹은 바다가 되고 혹은 시내가 되어
모진 바위에 부딪쳐 지하로 숨어들지라도

이는 나의 가슴에서 피가 되고 맥이 되는 생명일지니
나는 어디로 가나 이 끊임없는 생명에서 영광을 찾아

남북으로 양단되고 사상으로 분열된 나라일망정
나는 종처럼 이 무거운 나라를 끌고 신성한 곳으로 가리니

오래 닫혀진 침묵의 문이 열리는 날
고민을 상징하는 한 떨기 꽃은 찬연히 피리라
이는또한 내가 사랑하는 나라 내가 사랑하는 나라의 꿈이어니...

 

 

밑의 글은 이 글에서 다 담지 못한 독립기념관에서 본 독립운동가분들의 말씀을 담았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본 이 말씀들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https://bluehairpin.tistory.com/73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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